초록 열기/닫기 버튼

동아시아 문단에 있어 장혁주는 매우 독특한 존재였다. 그는 「아귀도」로 일본 개조지의현상소설에 2등을 입선하여 이른바 중앙문단으로 진출하였는데 조선문단은 그의 일본어 글쓰기를 조선문학으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문단이 적극적으로 장혁주의 작품을 조선문학이라는 명목으로 번역하였고, 이 시기에 번역된 조선의 작품 중에 장혁주의 작품이 절반 정도를 차지하였다. 또한 대만문단은 장혁주를 롤모델로 삼았을 정도로 장혁주가 동아시아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조선문단에서 제국의 언어를 택한 장혁주의 소설을 조선문학에서제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질 때 해외문단에서는 그를 조선의 대표적인 작가로 받아들였다는 독특한 장혁주 현상이 출현하였다. 장혁주 현상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라는 시국의 산물이다. 만주사변 이후 일제는 중국대륙과 연결되어 있는 조선을 병참기지로 재발견하여 조선의 물적과 인적 자원을 총동원하기위해 장혁주의 작품활동을 포함한 이른바 ‘조선의 붐’을 만들어냈다. 일제가 침략의 목적으로 만들어놓은 장혁주를 중국문단은 식민침략을 저항하는 약소민족 문학으로 받아들였다. 일본의 침략을 대항하기 위해 중국은 조선 등 약소민족들과 연합한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정치적 타산으로 중국문단이 장혁주를 적극적으로 소개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일본과 중국문단이 모두 장혁주를 조선의 대표적 작가로 부각시킨 것은 실은 전쟁이라는 시국에 조선을 재발견하는 결과다. 전쟁이 발발했는데도 일본문단이 만든 장혁주라는 상품을 중국문단이 기꺼이 받아들인것은 프로문학의 국제성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1919년 코민테른을 창설할 때 레닌이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와 피압박민족이여 단결하라”고 외치면서 식민지의 민중을 프롤레타리아에 포함시켰다. 이에 따라 일본의 좌익문단은 식민지의 비참한 현실을 묘파한 장혁주의 작품에서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성을 발견하여 에스페란토로 번역하였다. 중국 좌익지식인이 이 에스페란토 역본을 다시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이 때 검거로 인하여 일본의 좌익문단이 대부분전향하여 파시스트적인 세계문학의 구축에 나섰고 장혁주 본인도 펜부대의 일원으로 일본의‘세계’로 투신하였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좌익문학은 약소민족에 바탕을 둔 프로문학을중심으로 하는 세계문학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장혁주의 친일 사실을 은폐한 채 장혁주 그리고 그가 대변하는 조선문학을 이 세계문학 속으로 포섭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문학은 일본과중국의 세계문학 판도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在東亞文壇,張赫宙是個非常獨特的現象。他通過《餓鬼道》當選日本《改造》 二等獎而進軍所謂的中央文壇,但朝鮮文壇卻認為其日語作品非朝鮮文學。但 是,包含臺灣在內的中國文壇卻認為張赫宙的小說為代表性朝鮮文學。由此,張 赫宙成為一個文學現象。 張赫宙現象的出現是時局的產物。九一八事變後,與滿洲接壤的朝鮮成為日 本的軍事基地,為掠奪朝鮮的人力與物力資源,日本製造出以張赫宙為代表的 “朝鮮熱”。中國為抵抗日本的侵略,將朝鮮塑造成弱小民族的典型代表,進而也 積極宣傳張赫宙。中日戰爭的爆發以及中日對朝鮮的再發現促成了張赫宙現 象的出現。 在戰爭爆發之時,中國文壇欣然接受了日本文壇製造的張赫宙,其原因在於普 羅文壇的國際性。日本普羅文壇將張赫宙的小說翻譯成世界語,中國普羅文壇 又從世界語譯成中文。大檢舉事件後,日本普羅文壇轉向,開始建構法西斯的世 界文學。而中國文壇則繼續以普羅文學為中心繼續建構反法西斯的世界文 學。中日又將朝鮮文學納入自己的世界文學版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