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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한국불교의 시대적 상황은 대체적으로 화엄종과 유가종 위주의 교종이 부흥한 반면 구산선문의 전승에 기초한 선적종의 발전은 부진하여 독자적인 특성을 발휘하지 못한 것 같다. 화엄종은 과거의 한계를 극복하고 당시 체제변화를 추구하는 사회적 상황의 필요에 부응하여 적절히 대처하였으며 왕실과의 인연으로 대두된 유가종과 더불어 교종의 부흥을 이루어냈는데, 선종은 중앙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1세기 선종의 특징으로는 10세기 후반부터 교종과 사상적 융통성을 갖고 있는 중국의 법안종에 유학한 고려의 선승들이 돌아와 당시의 사회적 요청에 부응하는 선풍을 보임으로서 신라말기에 개창한 선문 조사들의 마조 도일계의 가풍이 쇠퇴하고, 석두 희천계의 가풍이 역동적이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시대적 필요에 따라 ‘선교일치’의 경향에 적응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유학승들이 자신의 선문 법계를 고집하지 않고 다른 계통의 선사를 참방하여 사사하고 귀국한 뒤에 소신껏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오종이 현상적 가풍은 달라도 본질적 법은 같으며 모두 조계 혜능을 법조로 한 문중이라는 의식을 가졌으며, 당시에 중국에서 가장 활발한 법안종풍에 대한 호감은 물론, 고려 국내의 사회 현실과 자유로운 불교계의 여건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11세기 말기에 선종을 표방하는 천태종이 개창된 이후, 기존의 구산선문 전통에서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들어내기 위하여 당시 선적종이라고 불리던 이름을 조계종으로 바꾸는 계기를 갖게 되었고, 화엄에 기초한 의천이 선종과 교종간의 갈등과 편집을 해소하기 위하여 내세운 교관겸수는 교종의 교리적 바탕 위에 선종의 수행을 융합시키려는 시도였는데, 천태종과 친연성이 있던 법안종 계통의 선승들이 의천의 휘하로 들어갔지만, 학일과 탄연같은 선사들은 전통 조사선의 본분을 지키고 조계종의 선문 법맥을 유지하여 후대에 전승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11세기에 전승된 선종은 다음세기 무신정권시기에 정책적 지원으로 부흥의 기회를 갖게 되는데, 사굴산문의 보조 지눌은 의천의 입장과 반대로 전통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아우르는 정혜쌍수를 권장하며 조계종풍을 새롭게 가다듬고 결사 등을 통해 저력을 확충한다. 그 후 가지산문의 보각 일연과 태고 보우 등에 의해 조계종은 다시 전통 본령을 회복하였으며 조선조의 시련기를 거쳐서 현대까지 이어진다. 이는 11세기의 선종이 감내하였던 내외로부터의 시련과 도전을 극복하고 주체적으로 그 종지를 전승시킬 수 있었음에 나름대로의 시사를 받았을 것으로 본다.


It is a study to investigate the situation of Buddhist society in Korea during the 11th century when the Seonjong(Seon Meditative School) seemed to have had a hard time to manage their characters. It can be said that in the century the Seonjong had been in stagnation and out of main stream of the country but the Gyojong(Doctrinal Schools) of Hwaeom(Avatamsaka) and Yuga(Yogācārya) had been in self adjustment to revive and getting royal and governmental supports. A characteristic of Seonjong in the 11th century is that there were a change of interest from Ma∼tsu(709∼788) tradition to Shih∼tou(700∼790) tradition in Dharma lineage since having returned Seon masters who have studied at the Fa-yen Chan School in China which was opened to cooperate with the Doctrinal Schools. In the 11th century there had been a trend of the ecumenical movement among different traditions of Buddhist Schools in terms of ‘Seongyeoilchi’ or ‘Gyogwangyeomsu’ directing the Seon and Gyo should be practiced together. It seems that Korean Seon masters felt and thought that there were no differences in essence of Dharma among different Chan Schools in China but function with various means depend on Chan masters. After Cheontaejong(Cheontae Order) claiming as a Seonjong was established by Venerable Daegak Euicheon(1055∼1101) at the end of the 11th century, the Seonjeokjong calling for Gusanseonmun(Nine Mountain Seon Schools) has changed the name as Jogyejong(Jogye Order) to identify its lineage and tradition. Many Seon practitioners related with Beopanjong (Fa-yen-tsung) take parts in Cheontaejong but some masters kept their positions in the original traditions, for instance Seon Master Woneung Hakil(1052∼1144) and Daegam Tanyeon(1069 ∼1158). The tradition of Seon Schools in the 11th century maintained in the next centuries and revived with renewing spirit and promoting Jogye tradition by the great Seon Masters like Bojo Jinul(1158∼1210) who belonged to Sagulsanmun (Sagul Mountain Seon School) and Seon Master Taego Bou(1301∼1382) who belonged to Gajisanmun(Gaji Mountain Seon School). The tradition has been preserved in Jogye Order of Korean Buddhism until the present as the major Dharma lineage.